예수가 세상에 준 검

  • DKLaw 

마태복은 23장은 한 장 전체를 할애하여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의 경우에는 종교 지도자라고 한정한다 하더라도, 서기관의 경우에는 정치 지도자에도 해당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언뜻, 마태복음의 후반부에 나오므로 예수의 공생에의 후반부에 나온 설교라고 생각도 들지만, 요한복음 7:25절의 ‘(유대인들인)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이전에 한 설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찌되었건 마태가 기술한 내용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여 7번에 걸쳐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 중에는 그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꼬집는 내용도 나옵니다.

마 23: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자 여기에서 의문입니다.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왜 품어주지 못하고 저렇게 ‘극딜’을 하는가?

사람의 행동에 있어서 어떠한 절대 명제를 일관되게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역시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으나(마 7:1~2) 본인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을 극렬하게 비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득권 비판은 종국적으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이르게 된 원인임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서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대답이 존재할까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황희정승식 조정안은 일시적으로는 갈등을 봉합할 수 있겠으나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외식하는 자들은 강하게 비판하였겠지요.

예수의 ‘사랑’은 선에 대한 의지, 즉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비판하지 말고, 서로 서로 힘이 되는 말을 해주면 더 좋겠죠. 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그렇게 귀에 좋은 말만 해 줄 수 있는 일들만 있는건 아니지 않을까요? 예수가 얘기한 ‘세상에 검을 주러 왔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나온 말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10:34~36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는 빌라도에 따르면 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유대인에게는 죄가 있었습니다. ‘괘씸죄’였죠. 주류 세계의 의견과 다르기 때문에 결국 빌라도는 죄가 없다고 판단함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우려하여 유죄를 선고합니다.

‘괘씸죄’는 찾아보면 꽤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그랬죠. 도무지 죄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자식강간’이라는, 말도 안되는 누명을 뒤집어 씌어 부르주아 정부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합니다.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되지’라는 식의 허위 루머를 만들어서 민중을 선동하여서 말이죠.

예수는 그의 말이 유대 기득권 세력의 귀를 거슬리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거슬리는 말을 하고 다녔을까요? 만약에 말입니다. 예수께서 유화적인 표현만 사용하였다면, 과연 현재의 기독교는 존재하였을까요?

교회 생활에서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은혜’일까요? 어떠한 주제에 대해(목회자 혹은 사회 지도자) 비판하는 것은 때론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침묵이 강요되기도 합니다. 각자 얼굴이 다르듯, 생각하는 것도 다를 수 밖에 없나 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의감이 최우선의 가치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관계가 최우선의 가치일 것이죠. 어떤 사람은 다수로부터 인기를 얻는 것이 최우선 가치일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지금 한국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